레진코믹스에서 숏컷을 재미있게 보았다.
알고보니 작가님은 예전에 내가 페이퍼 애독자였던 어느 시절의 객원기자.
솔직한 글들이 매력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겨레에서 이제 막 연재가 종료된 <연애인의 기쁨과 슬픔>을 주르륵 읽어보았는데 아주 좋다.
책으로 묶여져 나온다면 구입해야지.
연재 마지막 글에서
좋아하는 사람한테 의연하고 싶어 가슴속 꽃밭 대신 오늘도 달린다.는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
한겨레21, 이슬아 <연애인의 기쁨과 슬픔>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연애가 끝나서 자꾸 눈물이 났던 작년 어느 날에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
누나, 슬플 땐 많이 걸어. 그럼 길 여기저기에 슬픔을 두고 올 수 있거든.
나는 원래 많이 걷는 사람이었지만 그날 이후 더 많이 걸었다. 많이 슬픈 날엔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매일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기쁘거나 슬프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러 나갔다. 장마철에도 쉬기 싫어서 방수 재질의 러닝복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수압이 너무 센 샤워기 밑에서 달리는 느낌이었다. 다음날 몸살을 앓으며 비 오는 날엔 뛰지 않기로 다짐했다.
누구나 스스로에게 다른 방식으로 엄격할 텐데 나는 이 부분에서 나를 잘 봐주지 않는다. 게으르게 보낸 하루일수록, 연재하는 글과 만화가 창피할수록, 연애가 어렵고 외로울수록 더욱더 열심히 뛰고 온다. 내가 사는 서교동에서 출발해 망원동을 지나 합정동을 지나 상수동을 지나 서강대교를 찍고 돌아오는 코스다.
대체로 아무 생각 없이 뛰지만 길 어디쯤 물웅덩이가 있는지 오르막과 내리막이 언제 끝나는지 내 다리가 외우고 있어서 넘어지지도 삐끗하지도 않는다. 집에 와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손빨래를 하고 나면 체력이 기분 좋게 소진되어 있다. 그 상태에서는 애인에게 괜히 투정을 부리거나 과민하게 질투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청승을 떨다가 싸울 확률이 줄어든다. 내가 ‘혼자를기르는 방법'이다. 엄마는 가슴속에 꽃밭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나는 꽃밭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서 우선 다리 근육부터 길렀다. 오래 달리는 호흡도 익혔다. 입을 다물고 가볍게 숨을 쉬며 뛰는 법 말이다.
이렇게 애쓰는 이유는 우아해지고 싶어서다. 나는 애인이 바빠서 나에게 무심한 날에도 꼬이지 않은 마음으로 그 애가 하는 일을 응원하고 싶다. 그 애 주변에 있는 매력적인 애들에 대해 조바심을 느끼지 않은 채 연애를 이어가고 싶다. 별다른 연락이 없는 밤에도 기분 좋게 내 할 일을 잘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누구를 너무 좋아하는 동안 그 사람에 대해 의연해지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와 같이 잘 지내는 것에도 실패하고 혼자 잘 지내는 것에도 실패하는 날이 있다. 그런 실패뿐인 날에는 열심히 뛰어서 땀을 내고 터벅터벅 걸어서 집에 오는 수밖에 없다.
내가 혼자 걷고 있단 걸 믿을 수 없어서 괜히 뒤를 돌아볼 때도 있다. 그럴 땐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애를 모르고도 잘 살았던 시간을 상기해본다. 나의 근사한 친구들과 스승들의 얼굴도 떠올려본다. 연애 말고도 중요한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고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일해야 하며 월세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그 애를 그리워하느라, 더 사랑받길 원하느라 시간과 마음을 흘려보내는 건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다가 전화가 걸려온다. 근처에 있다고 그 애가 말한다. 그럼 나는 방금 막 뛰기 시작한 사람처럼 빠르게 그 애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규칙적으로 달려온 덕분에 뱃살이 줄고 다리 근육이 늘어서 예전보다 더욱 빠르게 그 애한테 갈 수 있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자주 실패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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