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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

정확한 사랑의 실험과 그래비티와 조제...

 

 

 

오랜만에 도서관에 다녀왔다.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책과 처음 읽는 책을 같이 빌려왔다.

 

가장 좋은 책은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것도,

팟캐스트에서 소개해준 것도,

남의 블로그에 게시되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직접 읽고 마음에 새겨둔 것

역시, 가장 좋은 책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 소개되는 영화와 그 해석을 통해

보았던 몇 편의 영화는

 

신형철 평론가가 대상을 최대한 정확하게 읽으려는(사랑하려는) 노력을 해 준 덕에

처음 보는 것도, 다시 보는 것도

모두 이 책을 통해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보게 된 영화 중에 하나는 <그래비티>.

 

사랑하는 가족도 연인도 없이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채

우주를 떠돌며 우주 장비를 수리하는 스톤 박사는

조난을 당해 우주 미아가 되고

어쩌면 당장 죽어도 아쉬움이 없을 스톤은 동료 매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살고자 노력하고 결국 생존하게 된다.

 

매트가 스톤에게 해준 이 말이

내게도 어떤 힘이 되고 깊이 새겨졌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가기로 했으면 그냥 계속 가야하는 것.

땅에 두 발을 붙이고 나아가는 것이 삶이야."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 마음산책, 2014) 에서 다음 글을 옮겨본다.

 

1.

결국 텍스트에 대한 모든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2013년 하반기 내가 읽은 텍스트들은 대체로 '삶의 의미'라는 주제 둘레로 모여들어 서로 연결되고는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렇게 되기를 내가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에서 답을 찾는 태도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고, 신앙에 근거해 답을 제시하는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해소해버리는 것에 가까운) 태도 역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답을 찾고 싶었다. 이 와중에 이 영화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도 같은 질문을 발견(투사)했을 것이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가 내게 준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면, 생명이 긍정되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대답에도 역시 만족하지 못한다. 어쩌면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린 것일까.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나는 내 생명의 반절을 살았다. 나 역시 어떤 식으로건 나를 다시 낳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2.

비록 이 영화가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비관적 결론이 거절하는 것은 낙관이지 희망이 아닐 것이다.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에 도달하는 일이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불가능하지 않으므로, 필사적으로 무죄추정의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나는 다시 서사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서사는 언제나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들고, 모든 진정한 이해는 성급한 유죄추정의 원칙을 부끄럽게 만든다. 예컨대 <롤리타>라는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한 인간을 이해하는 말이 아니라 오해하는 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내를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방법밖에 없다.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좋은 비평의 힘을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놓치고 지나갔을 의미들을 눈여겨 보게 되어서 다행이다.

 

신형철 님의 진행하셨던 팟캐스트를 즐겨들었는데

어느 날 썼던 일기.

 

현실에서는 특히 친구로서는 농담, 유머와 거리가 먼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님의 팟캐스트를 듣고서 도무지 유머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진지함이 매우 멋있게 느껴졌다. 박찬욱 감독이 게스트로 나온 에피소드를 들었는데 요즘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이런 진지함 앞에 어떤 경건함 마저 느껴졌다. 시덥지 않은 농담이 잘못 가져오는 부정적인 파장을 생각할 때,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나 타인의 창작물에 얼룩을 만드는 일이라면 남과 나를 동시에 존중할 수 있는 이런 진지함은 정말 멋있는 것이로구나.

 

얼마 전에는 십년만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보았다.

스무살 무렵에 보았을 때

다리를 쓰지 못하는 조제는 그저 가련하고 불쌍한 소녀,

그녀와 헤어지고 새로운 여자친구와 함께 떠난 쓰네오는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게 된 영화는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일들이 나를 조금은 변하게 했을 것이고

그러니 보이는 것도 달라졌을 것이다.

 

조제는 조제대로 멋진 사람이고,

쓰네오는 자연스럽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은

조제와 쓰네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 만의 여행을 떠났을 때.

 

조제가 간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

갑자기 쓰네오가 들어와 조제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운다.

쓰네오는 조제를 분명 사랑했지만

조제라는 존재가, 그녀와의 관계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밤, 수족관 여관에서 묵게 된 그들.

쓰네오에게 눈을 감고 무엇이 보이냐고 묻는 조제.

쓰네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라고 한다.

 

"그게 너를 만나기 전에 내가 사는 곳이었어.

나는 깊은 바닷속을 혼자 헤엄치는 물고기 였지.

그런데 너를 만나고 깊은 바다에서 나와 여러가지를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이제 너와 헤어지면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하지만 나는 잘 살아갈거야."

 

조제는 쓰네오를 보낼 준비를 마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제의 집에서 나온 쓰네오는 엉엉 운다.

"헤어지고도 친구로 다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조제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헤어졌고,

서로를 가끔씩 그리워 하겠지만

어쩌면 쓰네오 보다 조제가 더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제는 쓰네오를 사랑한 만큼, 아니 그 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책임을 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힘들고 버겁지만

어쨌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계속해야 한다는 것

 

결국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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