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의 시간들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서 제주에 다녀왔다.
햇빛이 좋은 한 낮의 제주와, 바람이 시원했던 아침 저녁의 제주.
다녀오니 이제는 정말 가을.
가고 싶은 마음을 오래 품고 있었는데 다녀오고 나니 역시 좋다.
처음 여행계획을 세웠을 때는 머무르는 시간 동안
멀리가지 않고 숙소 근처를 산책하고, 잠도 많이 자고, 책도 읽고,
좀 느리고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막상 여행할 때가 되니
몸을 바삐 움직이며 떨쳐버려야 할 생각도 많아졌고
자주 올 수 있는 곳도 아닌데 가보고 싶은 곳에는 들려야지.하는 생각으로
버스를 오래타고 참 열심히 걸어다녔다.
<첫날>
제주에 가면 꼭 묵고 싶었던 제주 서쪽 TheRoom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들어선 순간 이 곳이 며칠 간 나의 공간이라서 정말 좋았고
떠나온 지금, 조금 그립다.
생각해보니 한 낮에 방에서 머무른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하루 일정을 마치고서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고,
혼자 제주 막걸리도 마셔보고,
침대에 누워 좋은 사람들에게 제주 사진을 보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들이 참 좋았다.
베란다 창문에서 보이는 바다와 방으로 들어오는 바다 냄새.
숙소에 짐을 대충 정리해 둔 다음 밖으로 나가 금능해변 산책.
제주의 서쪽 바다가 정말 예쁘다고 느꼈다.
물이 많이 빠진 해변에서 모래에 새겨진 바닷물의 결을 살펴보며 천천히 걸었다.
트위터 별통에 담아두고 오고 싶어서 자꾸 봤었던 카페닐스.
기대했던 것 만큼 좋은 장소였다.
아침부터 저녁이 다 되도록 한 끼도 못 먹었는데
친구가 같이 저녁 먹자며 밥은 먹지말고 있으라고 한 것도 있고,
닐스에서도 식사를 따로 할 수 없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갈증이 나고 좀 피곤하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마신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제주의 풍경을 담은 엽서도 사고.
무엇보다 검둥이 개 고명이가 있어서 좋았다.
커피 다 마시고 친구 기다리며 마당에 앉아서 두리번 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는데
이 녀석이 쫄랑쫄랑 내 옆으로 와서 나에게 기대는 것이다.
한참을 만져주었는데 순한 녀석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하며 협재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털썩 앉아 추석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어찌나 크고 탐스러운지.
전주의 친구들도 슈퍼문이 떴다며 사진을 보내주고,
나도 제주의 보름달을 보내주고.
달을 주고 받는 저녁.
근처에 예쁜 소품가게가 있어 내 것과 친구의 선물을 사고.
가게이름은 서쪽가게.
<둘째날>
금능에서의 둘째날.
밀물의 시간.
파도 높이가 제법 높다.
한림공원 산책.
제일 예뻤던 것은 빨간 사루비아 꽃.
햇빛이 어찌나 좋은지 밀짚모자를 사서 쓰고 다녔다.
지나가는 여고생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목이 말라 감귤주스 마시면서 느릿느릿 산책.
오설록.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실연의 아픔 속에서도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주었구나.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되는 요즘. 그래서 조금 슬프지만 행복하다.
뭐가 그렇게도 실망스럽고 서운했는지 관계를 끊어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던 내게 서운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표현하지 않고 따뜻하게 토닥토닥 해주는 따뜻한 친구들.
내게 서운한 것이 많았을 친구 하나.
명절이라 오랜만에 고향인 제주에 내려와서 가족들과 지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집에서 오는데 두 시간이 걸리는 내가 있는 곳 까지 흔쾌히 와주며
제주의 좋은 곳을 보여주려하고, 맛있는 것을 같이 먹어주고, 예쁜 사진을 건네주었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가 아쉬울때만 찾는 내게 서운한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아서였는지 말은 무뚝뚝한데 내게 보여주는 모습들이 너무나 다정해서 웃음이 슬슬 나왔다.
녀석, 마음은 약해가지고.
친구가 올해 수학여행 때 학생들 데리고 가보았다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노을이 지기 시작해 이 모습을 잘 보려고 금능해변으로 서둘러왔다.
이걸 보려고 제주에 온 것 같은 기분.
<셋째날>
조금 늦게 일어난 셋째날.
숙소 옆 성아시에서 해물뚝배기로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먹고
사려니 숲길을 찾았다.
사려니숲길 안내소 입구에서 붉은오름까지 십킬로미터 코스.
두시간 반 정도를 진한 숲향기를 맡고, 바람이 수풀사이를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아기 노루도 만나고.
이렇게 좋은 숲을 혼자서 고요히 걷는다는 것 참 좋다.
다시 해보고 싶다.
별다른 말 없이도 손잡고 걷는 것만으로 그저 좋은 사람과 다시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