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들

일상

구월의 칠 2016. 3. 20. 15:18

1.

 

얼마의 돈을 더 들이면 시간을 벌 수 있는데 케이티엑스를 타면 1시간 40분만에 용산에 도착한다.

이렇게 시간을 단축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이후로는

우등버스라도 세 시간을 버스에 앉아 가는 것이 좀 힘들어졌다.

 

어제 탄 기차에서는 전화 통화소리나 아이들 우는 소리 같은 것이 없이 조용했다.

조용하고 흔들림없는 공간에서

세번 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손톱 영양제도 바르고,

한곡 반복하기로 양창근의 고백을 들었다.

 

어제 옆자리 운은 아주 좋았다.

특유의 체취나 통화소리, 남의 자리를 침범하는 신체상의 성가심 같은 것들 없이

그저 조용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올라가는 기차에서 옆자리에는 중년여자분이 앉으셨는데

옷을 아주 잘 차려입으셨고 핸드백과 요즘은 보기드문 피처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창밖을 보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리려는 움직임을 하시길래 내 쪽 테이블을 올리고 다리를 끌어당겨 지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더니

내게 "잘가요" 인사를 하시며 내리셨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 인사에 미처 답을 하지 못하고 읽던 책을 계속 응시하고만 있었는데

"안녕히 가세요"라고 정답게 인사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집에 오는 기차에 올랐더니 내 자리에 한 청년이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청년에게 그 자리가 맞냐고 물어보니

멋쩍게 웃으며 "제가 착각을 했네요"하며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청년은 기차에서 내내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어떤 빈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유시간에 무언가를 익히는데 쓰는 사람을 보면 참 좋아보인다.

시간을 잘 쓰는 사람은 멋있구나.

 

2.

오늘은 햇살이 좋다. 미세먼지가 있다지만 햇빛 좀 받으라고 화분들도 밖에 내어다놓고 이불을 빨아 널고.

이렇게 햇살 좋은 날에 같이 손잡고 산책할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 봄에는 쉴 새 없이 마음의 여유없이 일에 끌려다니느라

아름다운 계절 한 가운데에서 밀려드는 울적함에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올 해 봄에도 나는 여전하다.

작년에 많이 들었던 '봄 사랑 벚꽃말고'는 이번 봄에도 나의 BGM이 되어주겠네.

 

일상과 감정을 공감하고,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이렇게 좋은 계절을 같이 누릴 수 있는

좋아하는 사람 하나를 곁에 두는 것이 내게는 유독 왜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마구마구 서글프다.

차라리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좀 나을까.

 

3.

 

 

'봄', '고백' 이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노래는 대부분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

 

멜론에서 추천음악으로 듣게 된 이후에

매일 듣고 있는 양찬근의 고백.

 

그때 했던 말이
네게 했던 말이
처음 했던 말이
이젠 입에 배어 버리고

용길 내서 했던 말이
울며 했던 말이
힘들었던 말이
이젠 편히 나와 버려도

내가 하는 말이 널 향한 맘이
변한게 아닌 떠난게 아닌
내 걸음걸이와 몸뚱아리가
가끔 길을 잃고 헤매어도

네가 하는 말이 날 향한 맘이
날 보는 눈이 날 있게 해줘
그대 나와 함께란걸 믿어 의심치 않아요

간절했던 것이
늘 원했던 것이
어려웠던 것이
이젠 당연히 여겨지고

항상 꿈꿔왔던 것이
바래왔던 것이
염원했던 것이
이젠 오래전 일 같아도

시간이 흘러도
너의 손을 놓치않을게
난 너를 떠나지 않아
항상 네 곁을 지킬게
그대 나와 함께란걸 믿어 의심치 말아요
라고 말하는 내 고백, 이 노래

 

 

4.

한 번의 긴 연애와 또 한 번의 아주 짧은 연애를 통해

나는 깔끔하게 이별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계속 매달리며 지지부진하게 관계를 이어가려는

찌질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만날때는 진심으로 좋아하는게 맞을까란 의심을 계속 품으면서

왜 정작 헤어지자고 할 때는 못 헤어지겠다고 이 난리일까.

다른 것들은 매정하게도 잘 끊어내면서 바보같이 왜이럴까 정말.

이런 내가 싫다. 이번에는 정말 바보같은 짓 그만하고

그 사람말처럼 정신차려야지.

끝내 정신차리란 말까지 듣고야 말다니.

 

5.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이 책이 지금의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어준다.

 

둘 다 같은 일, 김소연

자세한 속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가까운 이들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나면, 돌아서서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했던 말들이 벌떼처럼 나를 에워싸고 윙윙댄다. 내가 뱉은 말들 속에서 벌에 쏘인 것 처럼 앓는다. 언제부턴가 퉁퉁 부은 붓기와 따끔거림이 나의 신체가 되어 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입 밖으로 뱉어지는 이야기는 매번 어리석었다. 정교할 수 없고 정확할 수 없는 엉터리가 되었다.

 

절도, 황인찬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인간들의 일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어떤 불충분함을 가졌기 떄문이다. 무언가가 치명적으로 누락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삶과 죽음도 모르는 채로 책처럼 조용히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 혼자 있을 때조차도 사실은 진정으로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 아마 이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은 사랑이라는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리라. 사랑이 언제나 질문으로 구성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우리는 묻는다. 너(나)는 누구인가.

 

6.

 

 

봄은 다 가고 -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연남동 작은 서점에 갔을 때 윤동주 시집을 산 것을 계기로 정말 오랜만에 읽고 있다.

복간된 초판본 시집은 너무 예뻐서 눈길을 사로잡고.

 

영화 동주는 이준익과 신연식이 함께 만들어낸 장점이 많은 영화.

영화에서 읊어지는 시들이 마음에 닿을 때 느껴지는 뭉클함 같은 것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